맨위로가기

하라다 노부타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라다 노부타네는 1560년, 구사노 시게나가의 아들로 태어나, 류조지 가문, 시마즈 가문을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활동한 무장이다.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 이후 시마즈 가문에 종속되었고, 1587년 히데요시에게 항복했으나 영지를 몰수당했다. 임진왜란에 가토 기요마사 휘하로 참전하여 1598년 울산성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설과, 그 이전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김충선과의 동일인 설은 부정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60년 출생 - 안니발레 카라치
    안니발레 카라치는 이탈리아의 화가로, 형제, 사촌과 함께 볼로냐에서 화실을 열어 인체 드로잉을 기반으로 미술 교육을 시작했으며, 라파엘로와 베네치아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절충적인 화풍으로 파르네세 궁전 천장화를 제작하여 바로크 회화 발전에 기여했다.
  • 1560년 출생 - 고토 모토쓰구
    고토 모토쓰구는 전국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한 무장으로, 구로다 나가마사를 섬기다 출분 후 오사카 전투에서 오사카 5인중으로 활약했으며 도묘지 전투에서 전사, 용맹함과 지략으로 이름을 떨쳤다.
  • 센고쿠 무장 - 오다 나가마스
    오다 나가마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워 유라쿠류를 창시한 다인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호 유라쿠는 도쿄도 유라쿠초 지명의 유래 설이 있다.
  • 센고쿠 무장 - 사나다 노부시게
    사나다 노부시게는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한 무장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인질, 세키가하라 전투 참전, 오사카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는 등 '일본 제일의 병사'로 불리며 에도 시대 이후 영웅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라다 노부타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하라다 노부타네
일본어 표기原田 信種 (はらだ のぶたね)
시대센고쿠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출생1560년 (일설에는 에이로쿠 3년)
사망1598년 (일설에는 게이초 3년 9월 24일)
또는 분로쿠 5년 (1596년)
통칭고로 (五郎), 고로베에 (五郎兵衛), 시모사노카미 (下総守)
계명쇼레츠인덴 겟소 류신 다이젠조몬 (昭烈院殿月叟隆心大禅定門)
묘소금룡사 (후쿠오카시 이전, 하라다 가문 보리사)
관위종5위하, 시모사노카미, 탄정쇼히츠, 시모쓰케노카미
주군류조지 다카노부
시마즈 요시히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사사 나리마사
가토 기요마사
씨족구사노 씨 → 하라다 씨
부모아버지: 구사노 시게나가
어머니: 마쓰오 나오나가의 딸
양아버지: 하라다 다카타네
형제의형제: 구라마치 노부토시의 아들 구사노 나가즈미
배우자류조지 다카노부의 딸
자녀요시타네 (다네쓰구)
다네후사
데루히메
생애
주요 활동아키즈키 씨 가신, 도요토미 씨 가신
사망 장소울산, 한국

2. 생애

하라다 노부타네는 1560년 구사노 시게나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고로였다. 아버지 시게나가는 구사노 씨에 양자로 들어갔으나, 류조지 씨의 압박으로 고로를 인질로 보내게 되었다. 숙부 하라다 지카타네가 오토모 씨와의 전쟁에 책임을 지고 자결하고, 그의 아들 하라다 히데타네는 전사하면서, 가문의 단절을 우려한 조부 하라다 다카타네는 시게나가에게 요청하여 류조지의 인질로 있던 고로를 불러들여 하라다 씨를 상속하게 했고, 고로는 하라다 노부타네로 개명했다.[8]

1568년경부터 노부타네는 인질로서 사가에 있었다. 타네카도가 총령이었지만 참언으로 몰살당하고, 동생 치카타네가 이었지만 1574년에 오토모 소린에게 우스키 씨와의 항쟁을 책망받아 자결했다. 히데타네도 이미 전사했기 때문에, 하라다 료에이(다카타네)는 구사노 가로 출가했던 차남의 아들, 즉 외손자를 양자로 맞이했다. 노부타네는 하라다 성으로 돌아가 종가의 뒤를 잇게 되었고, 원복 때 류조지 타카노부로부터 편휘를 받아 '''노부타네'''로 이름을 바꾸었다. 1580년에는 다카노부의 딸(실제로는 양녀일 가능성 있음)을 아내로 맞이했다.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 씨가 시마즈씨에게 대패하여 규슈의 패권은 시마즈 씨가 장악하게 되었다. 하라다 노부타네도 시마즈 씨에게 종속되었으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로 시마즈 씨는 히데요시에게 종속되었다.[16]

1587년 3월, 히데요시가 규슈에 도착했다. 노부타네는 4월 12일에 코라산에서 히데요시를 배알하여 사면받았지만, 소령(所領)을 과소 신고했다. 히데요시는 노부타네에게 지쿠고 국 카미츠마 군의 영주 쿠로키 이에나가의 유령 중 300정분인 1만 8천 석을 주고, 지쿠고로 옮겨 인접한 히고 국의 구니모치 다이묘가 된 사사 나리마사의 요리키로 삼았다. 그러나 노부타네는 사실 이토 군, 시마 군 · 사와라 군의 3군[19]을 영유하고 있었고, 히데요시는 이를 알고 "작은 신분으로는 집을 세우는 것은 무용하다"라고 말하며, 구령(旧領)을 몰수했다.[20][21]

1588년, 히고 국인 잇키가 일어난 책임을 져서 나리마사가 할복을 명받자, 노부타네는 히고 북반국을 받은 가토 기요마사의 요리키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부터 1598년 정유재란까지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로 조선에 출병했다.

2. 1. 가독 상속과 류조지 가문 시대 (1560년 ~ 1584년)

에이로쿠 3년(1560년), 구사노 시게나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때 이름은 고로였다. 하라다 다카타네의 아들이었던 아버지 시게나가는 구사노 씨에 양자로 들어갔으나, 류조지 씨의 압박으로 고로를 인질로 보내게 되었다. 한편, 하라다 씨의 가독을 이은 숙부 하라다 지카타네는 오토모 씨와의 전쟁에 책임을 지고 자결을 명받았고, 그의 아들 하라다 히데타네는 지카타네가 죽기 전에 전사했다. 가문의 단절을 우려한 조부 하라다 다카타네는 아버지 구사노 시게나가에게 요청하여 류조지의 인질로 있던 고로를 불러들여 하라다 씨를 상속하게 했고, 고로는 하라다 노부타네로 개명했다.[8]

1568년경부터 노부타네(고로)는 인질로서 사가에 있었다. 타네카도가 총령이었지만 참언으로 몰살당하고, 동생 치카타네가 이었지만 덴쇼 2년(1574년)에 오토모 소린에게 우스키 씨와의 항쟁을 책망받아 자결했다. 그 적자 히데타네도 이미 전사했기 때문에, 하라다 료에이(다카타네)는 구사노 가로 출가했던 차남의 아들, 즉 외손자를 양자로 맞이했다. 노부타네는 하라다 성으로 돌아가 종가의 뒤를 잇게 되었고, 원복 때 류조지 타카노부로부터 편휘를 받아 '''노부타네'''로 이름을 바꾸었다. 1580년에는 다카노부의 딸(실제로는 양녀일 가능성 있음)을 아내로 맞이했다.

덴쇼 10년(1582년), 노부타네는 류조지 씨의 부하로서 이이모리성을 거점으로 지쿠젠 서부의 사와라군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지쿠시 히로카도와 협력하여 나카군에 침입하여 요새를 구축하고 병사 300명을 들여 중신 카사 오오이노스케 오키나가를 수장으로 삼았다. 같은 군에서 오토모 측은 야마다 스미노리가 지키는 네코미네성(네코토게성)뿐이었고, 다치바나 도세츠는 양자 무네시게를 장수로 삼아 코모노 마스토키, 유후 코레아키, 오노 시게유키 등을 붙여, 네코미네성을 지키기 위해 요새를 공격하게 했다. 4월 16일 아침, 나카가와를 건넌 다치바나 세력 1,000명은 두 갈래로 나뉘어 요새를 강습하여, 하라다 세력의 방어를 격파하고 요새를 불태웠다. 카사 오오이노스케 등은 사와라군으로 퇴각했다[9].(이와토 전투)

덴쇼 12년(1584년), 노부타네는 조부 료에이[10]의 중신들보다 친부 구사노 소양을 의지하여 후견을 맡기고 중용했다. 소양의 전횡에 가신단으로부터 불만이 제기되었고, 노부타네도 이미 후견이 필요한 나이가 아니었기에 하라다의 가신들은 소양의 참견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가신단 분열 상황을 알게 된 키시타케성의 성주 하타 친은 하라다를 얕잡아보고 국경의 경계를 자주 침범하여 영지를 횡령하려 했다. 조시 (복숭아의 절)에 축하 사절로서 하타 토키자네가 왔을 때, 카사 오오이노스케·칸스케(시게타네) 형제와 말다툼이 벌어져 심하게 욕설을 퍼부었고, 후카에 료지·오니키 세이호·아리타 무네요시 등 다른 원로들이 중재하여 돌아갔지만 하타 친은 종제 토키자네가 수치를 당했다고 격분하여, 3월 12일에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침공했다. 하마자키[11]에 구사노를 막기 위해 1,000명을 남겨두고, 2,000명을 이끌고 하타 친은 시카가[12]에 진을 쳤으며, 보복으로 카사 오오이노스케의 영지인 시치야마구치의 민가를 불태워 주민 200여 명을 살해했다. 이에 대해 노부타네도 3,000명의 병사로 출진하여 요시이타케성에 집결하고, 선봉은 요시이의 해변에 진을 쳤다. 13일, 하라다 세력의 선봉 1,500명이 해변을 따라 전진하여 하타 세력의 선봉 1,000명(하타 토키자네)을 덮쳤다. 격전이 벌어졌지만, 그 와중에 더욱이 노부타네의 후속 부대도 시카가 고개를 넘어 산길에서 덮쳐 협격을 받은 하타 세력은 패주했다. 낭당과 함께 멈춰 서서 분전한 하타 토키자네는 카사 오오이노스케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타 친이 병사를 재결집하고 있는 곳에, 노부타네는 전군으로 이를 공격했다. 후카에성에서 후카에 료지가, 요시이성에서 요시이 료가 출격하여 가세했으므로, 하타 세력은 포위 공격을 받아 궤주했다. 하타 친은 돌격하여 노부타네와 함께 죽으려 했지만, 가신에게 제지당하고, 간신히 가라쓰로 탈출했다[13][14].(시카가 전투)

한편, 류조지 타카노부도 시마바라 반도의 코지다이 해안에 출진해 있었고, 시마즈 이에히사·니이노 타다모토·이쥬인 타다무네·아카호시 무네이에·아리마 하루노부 등을 장수로 하는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 오키타나와 전투에서 교전했지만 대패하여, 타카노부도 카와카미 타다카타에게 목이 베여 죽었다[15].

2. 2. 시마즈 가문 시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1585년 ~ 1592년)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 씨가 시마즈씨에게 대패하여 규슈의 패권은 시마즈 씨가 장악하게 되었다. 하라다 노부타네도 시마즈 씨에게 종속되었으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로 시마즈 씨는 히데요시에게 종속되었다.[16]

1585년 10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소무지령을 내려 규슈의 여러 다이묘에게 정전을 명령했지만, 이에 따른 것은 오토모 요시시게, 쓰쿠시 히로카도, 타치바나 무네토라, 타카하시 쇼운뿐이었다. 노부타네는 동족인 아키즈키 타네자네가 시마즈 씨에게 복속하자 이에 따랐다. 류조지 마사이에도 인질을 보내 항복하여, 지쿠고의 류조지 휘하 구니슈(国衆)들도 모두 시마즈를 따랐다.[16]

1586년 3월, 시마즈 요시히사는 히젠 침공을 시작했다. 시마즈 타다치카 등에게 쓰쿠시 히로카도가 농성하는 카츠오 성을 공격하게 하고, 시마즈 타다나가 · 이쥬인 타다무네에게 타카하시 쇼운이 농성하는 이와야 성을 공격하게 했다. 노부타네도 이와야 성 전투에 참가를 종용받았지만, 가신들을 대신 출진시켰다.[17]

같은 해 8월,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이 시작되자, 쿠로다 요시타카 · 안코쿠지 에케이를 선두로 모리 테루모토 · 킷카와 모토하루 ·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대군이 지쿠젠에 상륙했다. 노부타네의 가신단은 미야베 츠구준 · 아사노 나가마사에게 항복 의사를 전하고 노부타네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노부타네는 거부하고 여러 성의 방비를 굳게 했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코소 성을 포위하여 항복을 권고했다. 노부타네는 시마즈의 원군을 기다리며 농성할 각오였지만, 징집된 병력 중에서 쿠로다 가문의 가신인 쿠노 시게카츠가 제일 먼저 달려온 것에 놀라, 결국 싸우지 않고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12월, 히데요시는 쿠노 시게카츠에게 주홍 도장을 주고, 코소 성은 모리 세력에게 주기로 했다. 노부타네는 성에서 퇴거했고, 코소 성은 이후 파각되었다.[17][18]

1587년 3월, 히데요시가 규슈에 도착했다. 노부타네는 4월 12일에 코라산에서 히데요시를 배알하여 사면받았지만, 소령(所領)을 과소 신고했다. 히데요시는 노부타네에게 지쿠고 국 카미츠마 군의 영주 쿠로키 이에나가의 유령 중 300정분인 1만 8천 석을 주고, 지쿠고로 옮겨 인접한 히고 국의 구니모치 다이묘가 된 사사 나리마사의 요리키로 삼았다. 그러나 노부타네는 사실 이토 군, 시마 군 · 사와라 군의 3군[19]을 영유하고 있었고, 히데요시는 이를 알고 "작은 신분으로는 집을 세우는 것은 무용하다"라고 말하며, 구령(旧領)을 몰수했다.[20][21]

1588년, 히고 국인 잇키가 일어난 책임을 져서 나리마사가 할복을 명받자, 노부타네는 히고 북반국을 받은 가토 기요마사의 요리키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부터 1598년 정유재란까지 기요마사의 휘하로 조선에 출병했다.

2. 3. 임진왜란 참전과 사망 (1592년 ~ 1598년)

1592년 가토 기요마사 군대에 소속되어 임진왜란에 참전하였고, 1598년 울산성 전투에서 전사 혹은 병사하였다.

3. 김충선과의 관계

하라다 노부타네가 전사하지 않고 1592년 조선에 상륙하자마자 항복해 조선을 위해 싸운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김충선과 노부타네는 생년이 1571년/1560년으로 명확히 차이 나서 동일인일 수가 없으며, 노부타네(信種)라는 이름을 두고 굳이 뜻도 없는 사야가(沙也可)라는 가명을 쓸 일이 없다.[1]

또 다른 김충선으로 지목되는 ‘사이카 마고이치(일본 사이카 조총 용병대 우두머리의 별칭)’가 진짜 김충선이었다면, 자신을 본명(스즈키氏) 대신에 사이카라고 소개했을 가능성이 높고, 유력 다이묘가 아닌 시골 변두리 호족 집단이었던 까닭에 雜賀(잡하)라는 한자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사람 처지에서는 조선은 외국이므로 한자권이면 다 뜻이 통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조선 사람을 시켜 편지를 썼을 가능성이 높다.[1] 대필하는 사람에게 사이카라고 대답했다면, 듣는 조선 사람 처지에서는 조선식 표음대로 한자를 썼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사이카, 雜賀 -> 사야가, 沙也可)[1]

참조

[1] 웹사이트 Kusano-shi on Harimaya.com http://www2.harimaya[...]
[2] 웹사이트 Harada-shi on Harimaya.com http://www2.harimaya[...]
[3] 문서
[4] 서적 大藏姓原田氏編年史料 文献出版
[5] 문서
[6] 문서
[7] 간행물
[8] 문서
[9] 간행물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간행물
[14] 간행물
[15] 간행물
[16] 간행물
[17] 간행물
[18] 간행물
[19] 문서
[20] 간행물
[21] 간행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